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크 타티 (문단 편집) == 약력 == 파리 근교 르페크에서 태어났다. [[이탈리아인|이탈리아계]]-[[러시아계 프랑스인]]으로, 친가 쪽은 [[류리크 왕조]] 출신 러시아 귀족 가문이다. 친할아버지 드미트리 타티셰프는 러시아 육군 장군이었다.[* 정작 자크의 아버지인 조르쥬는 좀 고생을 한 편이다. 조르쥬 탄생 직후 드미트리가 의심쩍은 상황 속에서 사망하고 살기 위해 러시아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.] 원래 성인 타티셰프 Tatischeff를 보면 알겠지만 러시아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. 러시아 쪽 기록에 따르면 친할머니는 서커스 공연자이었다.[* 다만 러시아 쪽 기록에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나와있는데, 결혼했다는 프랑스 기록하고는 상충되는 상황. 당시 프랑스법에 따르면 아버지만 확실하면 출생신고가 가능했고 사실혼으로 인정했기 때문.] 외가쪽은 [[이탈리아]]-[[네덜란드]] 혈통으로 [[액자]] 제작에 종사했다고 한다. 때문에 [[금수저]]는 아니더라도 [[은수저]] 정도의 중산층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다. 어린 시절엔 공부엔 관심 없어서 학교를 중퇴하고 외할아버지에게서 [[액자]] 제작술을 훈련받았다. 군대 제대 후 영국 체류하는 동안 [[럭비]]에 관심을 가져 한동안 준프로 럭비 선수를 했다. 그러던 중 남들을 웃기는데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닫고 [[마임]]을 배우기 시작해 마임 연기자가 되었다. 초창기엔 [[마임]] 연기자로 유명했으며 [[영국]], [[독일]]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. 1930년대에는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. 이때 [[르네 클레망]]의 단편 영화에 출연해 주목받기도 했다. 하지만 [[2차 세계 대전]]이 터지고 징집돼서 참전하는 등 여러 사정으로 본격적인 장편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. 비시 정부 시절엔 [[카바레]] 연기자로 일했다. 이때 [[오스트리아 합병]]으로 망명한 [[오스트리아]]-[[체코]]계 댄서 헤르타 시엘과 연인관계였으나 헤어졌다. 둘 사이엔 딸이 있었으나 [* 이 딸은 2000년대 초 [[일루셔니스트]]이 애니메이션화 되던 도중, 그 각본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 자크 타티의 죄책감이 반영된 각본이라면서 크레딧을 요구한 적이 있다.] 자크의 누나가 반대해 [* 나의 삼촌에서 윌로 씨 누나가 무신경하고 우스꽝스럽게 나오는데, 헤르타 시엘 손자가 서운함의 표출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.] 재결합하진 않았다. 직후 미셸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. 종전 후에야 독립 제작사인 캔디 필름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. 첫 영화를 만들고 '''윌로 씨''' Monsieur Hulot라는 중절모를 쓴 구부정하고 어수룩한 신사 캐릭터를 창안해 페르소나 삼았는데, 첫 영화와 마지막 영화를 제외하고는 타티의 상징으로 남았다. 이후 [[우체부 학교]]로 장편 영화 감독 데뷔해 [[축제일]]로 상업적 성공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. 그리고 타티식 코미디가 완성된 [[윌로 씨의 휴가]]와 4년만에 첫 컬러 영화인 [[나의 삼촌]]으로 프랑스 내에서 비평적 격찬과 동시에 인기를 얻었다. 윌로 씨의 어수룩함과 [[슬랩스틱]]을 내세워 전후 프랑스인들의 삶을 경쾌하게 풍자한 두 영화는 아직도 타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